아름다움에 대하여

[낭만적 아이러니] 아트 인 컬쳐 2023. 3월호



안소연(미술비평가)



유독 어떤 형태가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을 비약적으로 키워줄 때가 있는데 그런 순간과 마주하면 “마음에 드는” 무언가에 끌리듯 설렌다. 진실한 형태, 진실하다는 말이 때때로 공허한 속임수처럼 들릴 테지만, 어떤 사실을 말해줄 형태가 지금 내 앞에서 나와 마주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일종의 믿음이라 말하고 싶다. 말하자면, 어떤 형태의 물질적 현존으로부터 스쳐가는 “무엇인가”를 감각하고 지각하고 인식하는, “그 알 수 없는 무엇에” 대한 이끌림은 한 형태로부터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신호나 기호”가 스쳐간 것을 증언할 수 있을만한 믿음을 줄 테니까. 장-뤽 낭시는 아이들을 위한 작은 강연 시리즈에서 마지막으로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하면서 몇몇 예시들을 나열한 후에 “아름다움은 진실의 문제”라 단언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반짝이는 “어떤 신호”를 향한 이끌림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는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법”에 관한 언급으로 강연을 마쳤다.[장-뤽 낭시,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갈무리, 2012(불어원서2009).] 이 강연을 기록한 책에 대해 떠올렸던 것은 순전히 내가 맞닥뜨린 “어떤 형태” 때문이었는데, <변신>(2023)이라는 제목을 가진 좀처럼 알 수 없는 형태를 “향한” 나의 마음을 변호하고 싶었던 까닭인지도 모른다.



두 세계를 사는

⟪낭만적 아이러니⟫(2023)는 아라리오갤러리(서울) 재개관에 맞춰 기획한 전시로 갤러리 전속 작가 다섯 명의 신작을 소개했다. 지하1층부터 5층까지, 2층을 제외하고 각 층마다 안지산, 김인배, 이동욱, 노상호, 권오상의 최근 작업 경향을 살필 수 있는 전시 동선을 꾸려 이를 아우르는 주제로 독일 낭만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이론적 개념인 “낭만적 아이러니”를 제시했다. 이러한 엮음은 다섯 명의 작가를 느슨하게 연결시켜 각각의 작업에 대한 주의력을 집중시켜 놓는데, 전시 전체의 풍경이 하나의 주제를 소실점 삼아 뚜렷한 원근감을 보여주기 보다는 ‘낭만(주의)’과 ‘아이러니’라는 파편적인 낱말들이 일종의 이미지 옆에 감성적으로 붙여 놓은 인스타그램 수사처럼 누군가의 공감 버튼을 활성화시키는 “힙함”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정황 속에서 김인배의 <변신>은 천장고가 높고 인공적인 흰 색 조명이 그 공백을 고르게 메운 듯한 1층 전시공간에서 수직적인 동세를 암시하는 신호들 중 하나로 제 형태를 새롭게 전개할 태세다. 적어도 세 개 정도의 수직적인 기둥-건축 구조의 일부로서 기둥, 임의의 똑같은 모양의 판재를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쌓아 올린 작품 <안개>, 프로펠러 구조를 지닌 <변신>-이 시선을 분산시키면서 임의의 꼭지점을 이루는데, 형태 때문인지 색깔 때문인지 아니면 재료의 질감 때문인지 직관적으로 다소 불안정했던 시선을 <변신>의 회전축에 고정시켜 놓기 충분해 보였다.

  나는 이 형태로부터 어떤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알 수 없는 낌새를 감지했는데, 이 사물이 나의 시선을 “향하여” (과거 또는 미래 시제의) 어떤 가능성으로 “나타나” 있다는 현존에 대한 강한 믿음 같은 거였다. 두께감이 거의 없는 이 선과 면의 구조물 한쪽에 어떤 예언(메시지)이자 흔적(글자)처럼 적어놓은 “나를 만지지 마라”는 문장은 얼마나 적절한 기호(말씀)이자 실체(육체)인가. 김인배는 성경 요한복음에 기록된 부활한 예수의 말씀을 낭시의 책에서 인용해 <변신> 내부에 삽입했던 거다. 이때 그는 프로펠러 구조의 형태 두 개를 만들어 금속 봉에 위 아래로 나란히 끼워 설치했다. 아래의 형태는 손으로 점토를 붙여가며 만든 것을 3D 스캔 후 출력해 레진과 유리섬유 등으로 표면을 감쌌고, 위에 있는 형태는 3D 모델링 후 프린트해 동일한 방식으로 표면을 처리했다. 앞에서 언급한 인용 문장은 위에 놓인 형태에만 표기했다. 오목한 부분과 볼록한 부분이 각각의 날개 양면을 형성하는데 한쪽 오목한 곳에는 가운데 배열로 “나를 만지지 마라”를 써놓고, 반시계 방향으로 앞에 놓인 날개의 볼록한 부분에는 거의 같은 자리에 “나를 만지지 마라”가 거울처럼 반전이미지로 적혀있다. 물질과 이미지와 문자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이 형태는, 사물 안에 수수께끼 같이 공명하는 양감과 그것의 현존에 대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한다.

  <변신>을 지표 삼아 <거울>, <칠판과 분필>(2023), <안개>(2023)는 서로가 서로에 밀착되어 있는 것처럼 함께 부합한다. 아니, <안개>의 내막에 따라 나머지 세 개의 작업이 서로를 지향하거나 벗어나려는 신호 안에 동시에 엮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인배의 작업은 개념적인 기호를 (오)작동시키는 사물의 논리를 유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물(객체)과 그 앞에 증인처럼 서 있는 신체(주체)가 서로를 지향하며 감각과 지각과 인식의 과정 속에서 존재를 증명하는 일종의 조각적 수사를 확장해 가는 면모를 보여준다. 조각적 형태와 체험에 관한 진실의 문제랄까, 이를테면 그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사유와 공감의 가능성 말이다.

  안지산은 회화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보여준다. 그는 “토끼”와 “고라니”, “사냥꾼 김씨”의 등장과 이들을 하나의 회화적 상황 안에 공존하게 할 환경으로 “눈”과 “바람”을 설정했다. 과거에 안지산은 점토로 토끼를 만들고 있는 사람의 손에 초점을 맞춰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그렇게 점토로 만든 (죽은) 토끼만을 그린 그림도 있다. 종이에 토끼를 그려서 오린 걸 나란히 세워 정물처럼 그린 그림도 있다. 얼마 전에는 “마리”라는 주인공을 내세워 폭풍 속에서 구름과 비와 돌산 사이에 놓인 한 인간의 초상을 회화적 실존으로 변환하여 나타낸 바 있다. 말하자면, 그는 현실의 어떤 풍경, 어떤 초상, 어떤 정물을 회화로 옮겨 오로지 회화적 요소로 그 대상 안에 내재해 있는 실존과 주관적 심리 등을 보편적 감각에 닿도록 시도한 셈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현실(의 연출)을 기록한 사진을 회화로 변환하면서 현실의 조화를 떨쳐 버릴 심산인지, 사진을 해체하고 편집하여 왜곡시켜 회화적 리얼리티로서 타당한 개입을 감행한다.

  앞서 언급한 <토끼 사냥>(2014)에 견줄만한 <고라니 사냥 1, 2, 3>(2023) 연작이 이번 전시에서 소개됐다. 안지산은 눈 덮인 산 속에서 도망치는 고라니 한 쌍을 회화 공간에 대입해 평면 위에 중첩된 색면의 환영과 물성으로 변환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특히 <고라니 사냥 3>에서 사냥꾼 김씨와 세 마리의 고라니가 눈 속에서 탑처럼 쌓아 올려진 장면은 흰색 물감의 시각적 압도감 너머로 수수께끼 같은 형태의 모순마저 우리의 (진실을 향한) 시선을 지속적으로 사로잡는다. 그 수수께끼는 <눈바람, 고라니>(2023)과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 때>(2023)로 이어진다. 길게 늘어난 고라니의 목을 흰 색 물감이 채운다. 김씨의 얼굴인가, 정황만 있을 뿐 실체는 모를 한 사람의 얼굴이 흰 색 물감의 격렬한 붓질 너머로 완벽하게 감추어졌다. 흰 눈과 차가운 바람이 일으키는 눈보라가 고라니와 김씨의 형상을 비현실적으로 왜곡시키고 있으나, 그의 회화적 리얼리티는 그 형태들을 빠져나와 우리의 시선을 향해 (진실하게) 보는 방법을 새롭게 인식시킨다.

  리얼리티와 보는 방법에 관한 아이러니를 말하자면, 이동욱이 만든 조각적 입체 설치 작업도 안지산의 회화적 공간과 교차하는 지점이 있다. 이동욱은 물성이 강한 스컬피 점토를 이용해 소형 인체 형상을 제작하는 작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의 작업 특성을 소형 인체 조각으로 특정하기에는 다소 협소한 감이 있다. 그가 인체 형상을 해체하고 결박하고 재결합하는 등 일련의 그로데스크한 분위기를 강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인체를 하나의 형태에서 물질로 재인식하고자 하는 주관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동욱은 초기 작업부터 트로피, 피규어, 애완용 동식물, 수석에 이르는 수집품에 대한 강박적 수집과 모방 행위를 참조해 인체 형상에 대한 조각적 변형을 꾀해왔는데, 이러한 참조적 행위 외에 주목해 볼만한 것은 형태와 물질 사이의 구조적 규범을 벗어나 서로가 서로를 지향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크레인>(2023), <계단>(2023), <절벽>(2023), <모퉁이>(2023) 등에서 강조된 것처럼, 몸과 사물의 결합은 이질적인 요소들의 기괴한 결합이라는 표피적인 지각 너머로 추상과 재현, 인간과 사물, 형태와 물질 사이의 미분화된 양태 가운데서 임의의 “진실한/아름다운” 존재를 향한다. 이동욱은 스컬피와 허니콤 패널, 실과 금속, 나무와 플라스틱 등 이질적인 재료들을 결합해 쉽게 규정할 수 없는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공존시켜 하나의 조각적 (삼차원의) 풍경을 완성해 놓았다.



나르시스의 아이러니

노상호의 <THEGREATCHAPBOOK4HOLY>(2023) 시리즈는 이번 ⟪낭만적 아이러니⟫에 함께 전시된 <THEGREATCHAPBOOK3>(2023) 시리즈의 후속 버전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동안 먹지 드로잉과 데일리 드로잉의 컨셉을 유지하며, 스스로 (무작위의) 이미지를 베끼는 복사기에 자신을 대입하여 (사실을 기계 보다 더 빠른 손이지만) 이미지의 복제와 원본, 출력과 열화 등의 개념을 자신의 몸에 체화시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그러는 사이에 <THEGREATCHAPBOOK3>처럼 먹지 드로잉의 얇은 물성은 AI의 진화처럼 일종의 자기 갱신을 시도하게 됐는데, 투명하고 평평하고 반짝이는 스마트 기기의 액정에서 펼쳐지는 이미지 소비의 대척점에 현실에(만) 남겨진 이미지 열화의 흔적으로서 강렬한 물성의 현존을 동기화 해놓았다.

  이때 진실한 형태, 진실한 이미지가 가능한가? 노상호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복사기와 겨루든가, 디지털 이미지를 모방하는 에어스프레이를 손끝에서 분사하는 휴먼이 된다든가, AI와 농담 따먹기 하듯 말이 안되는 이미지를 액자 속에 박제해 버리는 식으로 일련의 판단을 유예해 놓는다. 대신 두 세계의 경계에서 각각의 “진실함”을 향해 열려 있는 (반대편의) 시선과 밀착되기를 기꺼이 감수한다. 낭시는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에서 나르시스 신화의 의미가 왜곡된 것을 바로잡으며, 그것이 의미하는 “아름다움을 향한 시선”에 대해 강조했다. 그는 나르시스가 물속에 비친 자신을 보았을 때, 그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아름다움으로 열려 있는 시선을 본 것”이라 말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노상호와 권오상의 작업에 공존하는 비약적인 아이러니가 나르시스와 나르시스 이미지 사이의 “열린 관계”를 떠올리게 했다.

  가벼운 조각에서 출발한 권오상의 사진 조각은 디지털 (사진) 기술의 발전과 함께 스스로 갱신을 도모해 왔음에 분명하다. 사진을 구부려 평면에서 입체로 전환한 조각의 표면은 그 내부 지지체의 부재를 조명하다가 다시금 표면과 분리된 조각적 지지체의 존재를 증명한 끝에, 죄근에는 조각적 지지체와 표면 간의 불일치를 탐구하는 국면으로 넘어간 듯하다. 사진을 매개로 삼차원적인 조각의 세계를 갱신하고자 했던 권오상은 그에게 열린 가상 세계로부터의 시선을 작업에 포함시켜 둘 사이의 밀착된 동기화를 실험하는 중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가장 이목을 끌었던 것은 전시장 바깥에서 이번 전시와는 무관하게 갤러리 건물 앞에 새로 세운 청동 채색 인물 조각이었는데, 전통적인 조각적 재료(청동)와 회화적 기법(채색)을 디지털 기술(3D 프린트와 에어 브러시)이 매개된 이미지화 과정 속에 개입시켜 조각과 회화, 현실과 가상의 기시감을 묘하게 반영하는 조각적 갱신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새로운 시도들 앞에 “낭만적 아이러니”와 같은 수사적 행위로서 “아름다움에 대하여”라는 문구를 낭시에게서 참조해 와 붙여본다.












©2023 Inbai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