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는 저 먼 데서 나타나

[김인배: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 월간미술 2020. 11월호


안소연(미술비평가)


형태는 저 먼 데서 나타나, 스스로 거리를 품는다. 이 말은 어떠한 정황을 가지고 있는데, 김인배의 개인전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에서 선과 공간, 면과 덩어리 사이의 인식을 통해 일어나는 연쇄적인 변환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그것은 어떤 형태의 “-되기”를 지각하는 것이며, 어떤 형태의 “원형/기원”을 기억하는 데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그것은 둘의 (혹은 셋의) “거리”를 인식할 만큼 충분히 떨어뜨려 놓았을 때, 떨어져 있으면서도 “어떤 것”으로 기억되어 서로의 원형을 공유하는 관계 안에 있게 된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는 형태에 관한 그러한 지각과 인식의 차원을 작동시키기 위해 연출된 일련의 극적인 공간임을 가늠케 한다. 김인배는 그 중심에 형태로서의 “선”을 놓고 그것의 연쇄적 변환을 모색하면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지각과 인식을 견인해 줄 조형적 탐구의 여러 면면을 보여준다.

나의 글은 그 시작점에 <멀리서 그린 그림>(2020)과 <가장 큰>(2020)을 놓아 보기로 한다. 그리하여 공간 안에 수직으로 곧게 세워 놓은 <선이 되려는 선>(2020)을 따라 가다가, 왼쪽 손에 쥐고 있던 <일정한 거리>(2020)의 촉각적 모양과 견주면서 서로 흩어져 있던 <삼면화: 크기, 동작, 개수>(2020) 사이의 거리를 몸으로 좁혔다 멀어졌다 반복하며 그 세 개의 덩어리들 사이에서 한참 서성였던 기억을 다시 떠올려 볼 것이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혹은 큰 맥락을 감춘 것처럼 오직 세 개의 선으로만 벽에 나란히 수평으로 꽂혀 있던 <극중극>(2020)을 보기 위해 선 위의 한 점에 시선을 꽂고 포물선을 그리며 옆으로 움직였던 내 몸의 감각을 다시 복기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들은 모두 숨길 수 없는 조각적인 경험이다.)

<멀리서 그린 그림>은, “선”에 대한 형태 연구에 집중했던 작업 과정에서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작화 감독 중 하나였던 이타노 이치로(Itano Ichiro, 板野一郎)의 미사일 액션 작화 기법을 참조했다는 김인배의 시점을 상상케 한다. (사실 쉬운 일은 아닌데, 그렇다고 아주 어려운 일도 아니다.) “멀리서 그린” 이 그림은 스스로 제 형태에 “거리”를 포함시키고 있다. 김인배는 4미터 정도 되는 길이의 알루미늄 파이프를 가져다 끝에 연필을 끼워 파이프의 반대편 끝을 잡고 가로 197cm, 세로 137.8cm의 큰 종이에 연필로 선을 그으며 그림을 그렸다. 유독 연성이 강한 선재인 알루미늄 파이프는 멀리 떨어져 있는 종이 위에 선을 그리는 행위를 직접 매개하면서 허공에서 구부러지고 출렁거리는 움직임을 만들어, 결국 종이 위에 그려진 선이 멀리 떨어진 거리만큼의 허공에서 알루미늄 파이프의 변형된 형상을 원형 삼아 모사된 것과 다름 없음을 알린다. 그는 줄곧 자신의 손으로부터 종이 면에 닿은 연필 끝을 인식하면서, 둘 사이의 거리에서 만들어지는 선재의 형태를 보며 그 움직임에 이끌려 저 먼 끝에 그것과 닮은 (최선의) 선을 그었을 테니까. <가장 큰>은 <멀리서 그린 그림>과 대구를 이루는 것으로, 가로 46.5cm와 세로 32.5cm의 유산지를 사용해 두 개의 모서리에만 어떤 것의 흔적처럼 연필 선을 그려 넣어 벽에 완전히 밀착된 상태를 보이고 있다. 두 개의 작업은 모두 아이맥스 스크린 비율을 각각의 화면에 적용해 같은 기원을 품고 있는 변환된 형태처럼 크기와 거리의 조형적 상관성을 지각하여 인식하도록 한다.

김인배는 이 모든 과정을 이끄는 하나의 축으로 조각적 형식과 태도를 부각시키는 것 같은데,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목적이기 보다 도구에 가깝다. <선이 되려는 선>은 <멀리서 그린 그림>과 <가장 큰>에서 직접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선의 형태로서 그것의 (기억과 관련한) 지각을 돕는 조각적 태도에 대해 조금 떨어진 데서 다시 환기시킨다. 알루미늄 봉을 공간에 수직으로 세우기 위해 그것의 출렁이는 물성을 덩어리처럼 매만지며 우레탄 도료로 감싸 “선이 되게” 했던 김인배의 행위는, 이치로의 미사일 액션 작화 기법을 전유한 조각적 과정을 거쳐 선을 그리기 위한 도구이자 원형으로서의 대상을 다시 복기한 셈이다. 그 선 위에 연필로 그린 선은, 이 상이한 매체의 선이 합쳐진 상태에서, 이 형태를 모사한 서로 다른/같은 그림으로서의 선의 변환이기도 하며 아직 지각되지 않은 (표)면-그것은 안팎에 거리를 품고 있으므로 반드시 공간에 놓이게 된다-에 대한 입체적이고 조각적인 인식을 암시하기도 한다.

<일정한 거리>는 3D 프린터로 출력한 세 개의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한 개를 손에 쥐고 내 몸이 <삼면화: 크기, 동작, 개수> 앞에 서 있는 일시적인 상태는 어떤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흥미로운 것은, 몸의 위치를 바꿀 때마다 하나의 전체 공간이 축을 계속 이동하면서 일정한 거리를 끝없이 산출해 내며 가상 공간의 원근법을 모델링 하는 것처럼, <삼면화: 크기, 동작, 개수>는 공간 안에서 지속적으로 개체의 변환을 보여준다. 작아졌다가 커지는 것은 심봉에 매달린 완성된 덩어리가 아니라, (<가장 큰>에 대한 지각처럼) 소조의 감각으로 덩어리(혹은 내부)를 “감싼” 표면이며 나와 대상 간의 서로 상대적인 거리이며 그때 그려지는 선의 크기, 즉 형태인 것이다. 다시 말해, 형태의 바뀜으로 개체의 동작/동세를 지각하게 하는 조각적 경험이다. 실제로, <일정한 거리>의 조각 모음들은 <삼면화: 크기, 동작, 개수>를 제작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주조해낸 중간 형태를 공유하고 있다. 한편, <극중극>은 이치로의 작화 기법이 크게 부각된 극장판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의 방법적 위상과 태도를 참조한 작업으로, 극 안에 있는 또 다른 극이 서로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면서도 분리되어 있으며 하나가 그 바깥 혹은 그 내부의 세계관을 이상화 하여 모사한다는 맥락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사랑의 대상을 기억/기념하기 위해 이상적인 형태로 옮겨 주조했던 소조의 고전적인 관습처럼, 덩어리와 표면과 거리와 선의 지각 관계를 만족시키는 이상적인 세 개의 선을 모사해 같은 공간 안에 혹은 바깥에 분리해 놓은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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